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18 민주화운동/왜곡/무장폭동설 (문단 편집) === 최초 시위는 민주화운동이지만 시민군 결성부터는 폭동으로 서로 분리해서 평가해야 한다? === 이는 그나마 극우세력 중 합리적이라고 자부하는 부류에서 내놓는 주장으로, [[조갑제]] 등 현장 증인들의 증거를 100% 무시할 수 없다보니 '최초 시위는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지만, 시민군을 결성한 순간부터는 반국가 무장세력을 결성하여 정당한 국가공권력에 대항한 것이므로 그 순간부터는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무장반란으로 평가하자'라는 주장이다. 이들은 [[부마민주항쟁]]의 경우는 똑같이 군대가 강경진압을 했지만 시민들이 무기를 들지 않았으므로 순수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지만, 광주는 시민들이 무장세력을 결성한 것이 결정적인 차이점이며, 시민군 내부에서도 도청에 TNT를 설치한 과격파와 무기를 반납하고 계엄군과 협상하자는 온건파가 나누어졌던 점을 들어 시민군 결성 전후를 서로 분리해서 평가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참고로 이들은 과격파는 무장세력, 폭도, 북한 특수군이고 온건파는 선량한 광주 시민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4.19혁명]]에서도 일부 지역에선 과격한 양상이 있었다.'''[* 실제로 4.19혁명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일부 시민들이 경찰들의 발포에 분노하여 차량을 징발하고 경찰들에게서 빼앗은 무기를 이용해 경찰서 등을 습격하고 군대와 추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광주 시민군은 분명히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반공구호를 내걸었고, 시민군 중에 거동수상자는 간첩 가능성 때문에 계엄군에게 스스로 신병을 인도하는 등 자신들이 대한민국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권을 찬탈한 반란세력에 대항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래도 어쨌든 시민이 공권력에 저항했으니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우선 용어가 혼동되는 것은 사실이긴 하다. 시민운동 중에도 폭력사태는 일어날 수 있고 말이다. 하지만 [[폭동#s-6|폭동 문서 6번 문단]]에서도 설명하듯, '시민의 저항권에 해당되는 집단 행동이면 시민운동', '약탈과 무분별한 폭력행위가 수반될 경우 폭동'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약탈과 폭력행위가 수반되는 경우 폭동이라 할 수 있다. 5. 18 당시 광주는 '''수도도, 전기도 끊기지 않았다.''' 폭동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끊기기 마련인 것들이다. 그리고 계엄군의 진압과정과 시민군의 저항과정에서 피해가 일어난 건 사실이지만, '''시민군은 약탈을 저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일반 시민분들이 시위대 및 시민군, 그리고 이들을 돕는 자원인들을(예, 택시기사) 자기만의 방식으로 도왔으며, '''오히려 황당하게도 [[제11공수특전여단]] [[이뭐병|소속 계엄군이 육군보병학교 교도대에게 오인사격을 당해서 화가 난다는 이유로 아무나 잡아다가 학살하는 과정에서 인근 상점까지 이유없이 약탈해 대는 추태를 저질렀다]].''' ([[https://www.namdo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47006|#]]) 간혹 약탈 근거랍시고 5.18 자료 중 [[http://www.518archives.go.kr/books/|5.18 자료총서의 재산피해 목록(21권)]]을 대는 경우가 있는데, 이건 말 그대로 5.18 동안 일어난 재산 피해 목록을 전부 적어놓은 것 뿐이다. 며칠 동안 그 정도 소요 사태가 일어났는데 재산 피해가 없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해당 기간 동안 손실된 재산 피해를 정리한 자료일 뿐, 피해 경위나 책임소재 모두 전부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시민군이 약탈을 하지 않았다는 증언은 있다. [[김영택(1936)|김영택]]의 저서 <5월 18일, 광주 - 광주민중항쟁, 그 원인과 전개과정>에선 > ...이러한 질서의식은 초기뿐만 아니라 '시민공동체 자치시기'에 들어가서도 잘 지켜져 광주시내 700여 은행 및 금융기관이 한 군데도 피해를 입지 않고 1,500억 원의 현금이 고스란히 보전됐다는 사실, 3~4건의 강력사건이 있긴 했지만 오히려 경찰이 엄존하던 이전보다 훨씬 적게 발생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라는 구절이 나온다. 또한 이 당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52900209207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5-29&officeId=00020&pageNo=7&printNo=18045&publishType=00020|동아일보 기사]]에서도, ''''중심가 상인들은 몇몇 점포의 진열장 유리만 깨졌을 뿐 피해품목은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광주)시내 백화점들이 5.18사태로 약탈당하거나 피해본것은 없는것으로 안다.(삼양백화점 관계자 증언)''''라고 나와있다. 애초에 시민들이 집총까지 했고, 마음만 먹으면 은행이라도 털 수 있는 상황이였다. '''그러나 당시 호남 최대 도시인 광주에서 털린 은행은 한 군데도 없었다.''' 그들이 만약 폭도나 강도, 약탈행위를 자행했다면 가장 먼저 털려야 할 곳이 항쟁 끝날까지 안전할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도, 대한민국 정부와 시민단체, 관련 역사가들이 수많은 증거 수집과 추적, 조사를 거쳐 내린 결론이 '''5.18은 폭동이 아닌 민주화 운동'''이다. 의문을 제기하는 건 좋지만, 제기하는 의문의 근거가 이미 죄다 반박당한 상황에서 추가적인 근거 없이 폭동이라고 주장해 봐야 평가가 바뀔 가능성은 만무하다. 굳이 한 사건의 전후를 분리해서 평가하려는 시도가 현재로서는 5.18을 폄하하기 위한 말장난 이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이유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